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티 도팽 루이 (문단 편집) == 비극적인 죽음 == 1711년,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에는 마치 저주 같은 비극이 일어났다. 1711년 [[4월 14일]], 아버지 [[그랑 도팽 루이]]가 [[천연두]]로 사망했다. 1712년 [[2월 12일]], 이번에는 아내 마리아 아델라이데가 [[홍역]]으로 사망했다. 프티 도팽 루이는 아내를 병간호했으나 끝내 사망하자 매우 슬퍼했다. 곧이어, 프티 도팽 루이 본인도 몸져눕더니 6일 후인 1712년 [[2월 18일]]에 세상을 떠났다.[* 이후 [[루이 14세]]는 프티 도팽의 동생이었던 베리 공작 샤를을 여러번 껴안으며 '내게는 이제 너밖에 없다' 말하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.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후 얼마 안 가 베리 공작 샤를은 1714년 사냥 중 낙마사고로 인해 할아버지 루이 14세보다 더 일찍 사망하고 만다.] 게다가 1712년 [[3월 8일]]에는 차남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가 [[홍역]]으로 사망했다. 게다가 3남 루이 역시 몸져누웠다. '''그러나''' 가정교사 방타두르 공작부인이 루이의 [[사혈]]치료를 막으려고 격리시켜서 루이는 살아남았고, 그는 1715년 [[9월 1일]], [[루이 14세]]가 죽자 [[루이 15세]]로 즉위했다.~~[[프랑스 혁명|부르봉 왕조 입장에서 보면 격리시키지 말았어야 했다.]]~~[*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 치세에 일어났으나 루이 15세의 실책들이 혁명을 일으켰다고 봐도 무방하다. 물론 가장 큰 책임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루이 14세의 책임이 가장 크긴 하다. 루이 15세 바로 다음가는 계승권자들인 부르봉-오를레앙 가문은 처음부터 입헌군주제 지지자로 유명했으니 루이 15세가 그냥 그대로 죽어서 왕위가 오를레앙 가문으로 넘어갔다면 프랑스 혁명을 막았을 수도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. ] 프티 도팽의 죽음은 루이 15세 치세 초기 프랑스와 스페인 관계가 험악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.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, 갓 2살밖에 안 되었던 루이 15세가 자녀를 남길 때까지 생존할 것이라곤 장담할 수 없었고, 애초에 그 전에 성인으로 성장할지도 의문이었다.[* 그런 예상과는 반대로 루이 15세는 64세까지 당대 기준으론 장수하긴 했다. 성욕도 왕성해서 후계자 걱정 할 필요 없이 2남 8녀를 낳기도 했다. 단지 중요한 것은 루이 15세의 성격과 능력이었다. ] 그랬기 때문에,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얻을려는 구상도 꽤 했었다. 만약, 프티 도팽이 오래 생존했다면 더 나아갈 것도 없이 프티 도팽이 왕위를 바로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에 펠리페 5세가 그런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